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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역사와 족보의 역사
작 성 자 운영자 작 성 일 2008-12-24 22:50:19

1. 성씨의 역사

 

성명(姓名)에서의 '성(姓)'이란 고대(古代) 모계사회에서 어머니의 성씨나 아이를 낳은 지 명을 좇아서 성씨를 삼았으니 '성씨'를 뜻한 글자이고, '명(名)'은 어두운 밤에 사람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구별하기 위해서 불렀던 '이름'을 뜻한 글자이다.  

한자어 여(女)와 생(生)의 결합인 성(姓)은 모계사회에서 여자의 혈통을 뜻하고, 씨(氏)는 부계사회에서 남자의 혈통을 뜻한다. 중국 주나라 때에는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성을 가졌고, 평민들은 진시황 때부터 가졌다.

석(夕)과 구(口)의 합성자인 명(名)은 캄캄한 밤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사용했다.

그래서 명은 자신이 불러서 남에게 알려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명(姓名)은 다른 사람과 구별할 수 있도록 호명하게 되는 성과 이름을 뜻하는 글자이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나라는 중국이며, 처음에는 주로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 산, 강 등의 명칭을 인용하여 성으로 삼았다.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 으므로 성을 강(姜)씨라고 하고,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 (姬)씨로 하였으며,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 한 것 등이 그 예이다.

우리 나라의 성(姓)은 중국의 한자문화(漢字文化)가 유입된 후인 삼국시대부터 사용하였 다고 한다.

 

2. 본 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씨가 점차적으로 확대되면서 같은 성씨라 하더라도 계통이 달라서 그 근본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동족 여부를 가리기 위해 본관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본관의 관(貫)은 본래 돈을 말하는 것으로, 돈을 한 줄에 꿰어 묶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이 친족이란 서로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본관은 시조나 중시조의 출신지 또는 정착 세거지를 근거로 호칭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봉군칭호를 따라 정하는 경우가 있다.

 

3. 족보의 역사

 

족보는 한 종족의 계통을 부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나타낸 기록으로, 동일 혈족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고 계승하며, 자랑스런 조상의 행적을 답습하고 동족간의 화목을 도

모하기 위한 한 가문의 역사책이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성이 중복되고, 한 성씨를 가진 자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 계통을 밝히기가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그 계통을 일목요연하게 밝히기 위해 계보를 만들었는데, 우리 조상들은 고려시대에 이를 처음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가붙이가 많아지고 문벌의식이 높아지면서 족보만들기가 유행했다. 이는 조선시대에 유교를 숭상하면서 신분질서가 강화되고, 제사의식 등 조상숭배사상이 퍼지며, 문벌이 강화되고남녀의 차별이 굳어지게 된 시대풍토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족보는 중국의 성씨제도(姓氏制度)인 한식 씨족제도(漢式氏族制度)를 근본 으로 삼고 발전하여 정착했는데, 그 시기는 1,000여 년전인 신라말⋅고려초기인 것으로 추정 된다. 족보는 처음 귀족사이에서 가첩(家牒)이나 사보(私報)로 기록하여 왔는데, 이러한 가계 기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에 오면서 족보 형태를 갖추는 가승(家乘), 내외보(內外譜), 팔고조도(八高祖圖)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발간된 족보는 조선초기인 세종 5년(1423)에 간행된 ≪문화유씨영 락족보(文化柳氏永樂族譜)≫로 알려져 있으나 그 서문만 전할 뿐이다. 그후 성종 7년(1476)에 간행되어 현재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가 최초로 가장 체계화된 족보로 알려져 있다. 또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도 명종 17년(1562, 10책)년에 간행되어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완벽한 체계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외 손까지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후일에 여러 족보를 만드는 데 좋은 모형이 되었다.

이 밖에 조선초기 간행된 족보는 남양홍씨(南陽洪氏,1454), 전의이씨(全義李氏,1476), 여 흥민씨(驪興閔氏, 1478), 창녕성씨(昌寧成氏, 1493) 등의 족보가 있다. 조선초기의 족보는 시대상황을 반영하여 친손, 외손의 차별이 없이 모두 수록하고 있으며, 선남후녀(先男後女) 에 관계없이 연령순위로 기재하고 있다.

족보가 더욱 일반화되기는 선조시대 중엽(1567~1608)부터이다. 문벌이 강화되자 각 문 벌들은 일족의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족보를 동원하였고, 이것이 족보를 발전시 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족보는 조선후기, 현대로 오면서 천민과 양반 사이의 신분이 엄격했던 조선초기와는 달리 본인과 후손의 사회적 신분을 유지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증표구실로 뚜렷한 고증도 없 이 미화하거나 과장, 조작하여 간행하는 일들이 많았다. 특히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 행되면서 누구나 성(姓)과 본(本)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일이 있어 동족 및 상호의 혈연적 친근원소(親近遠疎)의 관계가 의심스럽게 된 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