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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소씨 조상과 한민족의 정체성 및 사료 연구
작 성 자 운영자 작 성 일 2010-11-17 16:00:05

이글은 진주 소씨 회지 43호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저자의 승락을 받아 옮긴 것입니다.

진주 소씨(蘇氏) 조상과 한민족의 정체성(正體性) 및 사료(史料) 연구

                                                                    글쓴이 : 대종회 부회장 소재호(蘇在豪)

1. 한민족의 형성

  기후환경과 인간생활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지질(地質) 시대의 기후 변동(變動)은 인간과 생태계의 존립 자체를 좌우했다. 신생대 4기는 홍적세(2만년 전)와 충적세(1만년 전)로 나누어지며 그 시기 가운데 제1빙하기부터 제4빙하기까지 기후환경의 변동은 계속 이어졌었으며 그 주기를 따라 간빙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가 간빙기에 접해있다. 현대문명이 발달되면서 프레온 가스 등 기후 변화 인자가 늘어나면서 지구의 온난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남극 대륙의 얼음 만년 빙하가 녹아 무너져 내려 지구상의 수위(水位)가 높아져서 인간 생활이 위협을 받게 되고, 따라서 요즘은 과거와 달리 지구촌 각처에 집중 폭우가 쏟아져 홍수의 자연적 피해를 많이 받고 있다.

  지금부터 약 6500년 전만해도 한반도의 옹진반도와 중국대륙의 산동반도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약 8000년 전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동해는 한 큰 호소(湖沼)로 존재 했었다.

한 때 지질시대 기후변동은 북위 60도 부근까지 따뜻하여 몽골의 황색인종은 캄차카반도 베링해 알류산열도 알라스카와 북미 남미에까지 이주해 생활해 온 것이 지금의 인종 인디언들이다. 북미 그린란드 남쪽 추운 지방도 그 시기에는 기온이 따뜻하여 사람들이 한 기간 정착하여 생활한 흔적이 유물 출토로 미미한 자료이지만 증명되고 있다.

  한반도에 인류는 현생 인류계의 크로마뇽인 유형이 약 4만년 전을 전후해서 거주해오기 시작했었고 한반도와 양자강 북동부에서 북서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걸쳐 문화생활을 해온 흔적이 구석기 유물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얼마 후부터는 이 지역에 주거한 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하였는데 동이족이란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동쪽에 있는 족속들을 멸시하여 호칭(呼稱)했던 말로 우리로서는 수치스러운 것 없는 용어로 인식 일반화되었으며 위에서 말했듯이 이들 분포지역들은 아시아 대륙 동쪽 한반도와 산동반도 베이징 선양 라오허강 주변일대 넓은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 백의(白衣)를 즐겨 입고 순박한 생활을 하며 높은 도덕성을 갖춘 양질(良質)의 인간들이었다.

  이 터에 일찍이 고조선이 융성 발전했고 이어 부여, 고구려, 백제가 번성했으며 특히 4세기를 전후해서는 백제는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큰 영역을 지배해 온 후 고구려 못지않게 그 세력권이 일본의 중․남부, 중국 중․남부까지 확대 해온 흔적이 있으나 그 후 다른 막강한 지배 세력의 국가들에게 정복당해 그 역사적 자료들이 철저하게 은폐, 소멸, 불살라져 아직까지 확실한 사료들을 찾아 접하지 못하니 아쉽기만 하다. 고대 중국 일본 역사서에 사료가 어딘가는 있음직도 한데 아직 발굴해 내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이미 7만년 전에 구석기 문화와 6천년 전의 신석기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비교적 따뜻하고 살기 좋은 기후환경과 먹을 것이 풍부한 곳에서 생활하고 있던 인종이 시베리아 바이칼 지방 주변에서 만주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남하(南下)해 생활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빗살무늬의 문화를 형성하여 빗살무늬 토기 인이라 불렀고, 그 얼마 후 몽골·만주 일대에서 강인한 생활습성을 가진 무문무늬 토기 인이 남하해 이보다 먼저 남하해 문화를 발달시켜 온 빗살무늬 토기 인을 정복하여 기존세력들과 함께 동화되어 살아온 사람들이 한민족으로 구성된 것이며, 바로 이가 우리민족의 유래이며 정체성(正體性)이다.

2. 진주 소씨 조상의 정통

  맑은 날 다음에는 흐린 날이 오고 쇠도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이 있다. 과거 한 시대 강력한 권력을 누리며 정권 중심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이었거나 개국공신 또는 나라 발전에 어떤 공을 세웠던 사람들은 정권이 바뀌면 그 본인이나 집안씨족 후손들은 정적(政敵)으로 몰리어 탄압받고 유배되는가 하면 주살당하고 그 종족의 씨를 말렸다. 때문에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고 일부 종씨는 멀리 도서 벽지 깊은 산골을 찾아 숨어 은둔 생활을 하면서 피신을 하였다.

  고려왕조 왕씨 일가가 조선 개국 당시 공을 세운 이성계 일파한테 그러했었다. 구비전승문학(口碑傳承文學)으로 전해지던 정선(旌善) 아리랑의 유래는 왕씨 일파가 쫓기어 강원도 정선 최 산골(아우라지 등)에 피난 은거 생활을 해오는 동안 한이 맺혀 지어 불렸던 노래가 바로 그 예이다. 또한 왕(王)씨 성(姓)을 숨기려고 왕(王)자에 들입(入)자를 위에 씌워 온전전자 전(全)씨로 개성(改姓)을 했거나, 왕(王)자 양쪽에 한글 이(l)자를 붙혀서 밭전(田)자 전씨가 된 사례가 있다. 지금에 와 왕씨가 번족(繁族)하지 못하고 그 인구수가 소수인 이유가 그래서라고 한다.

  신라(新羅) 귀족 소(蘇)씨도 고려왕조를 개국한 왕씨한테 정적으로 몰리면서 그런 수난을 당하였다.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부족연맹사회의 지배자 임금(왕)도 소씨 조상이었다. 신라 개국공신도 소벌도리(蘇代都利)였으며 신라 수 백년 역사 속에서 오랜 동안 그 사회의 호족(豪族)·귀족 정치 중심인물로 군림 활약하여 왔던 인물들이 우리 조상 소씨였기 때문에 고려왕조 왕씨로부터 소씨 씨족이 저격대상이 되어 수많은 소씨 종족이 죽음을 당하여 수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소씨 일가 숫자가 타성(他姓) 씨족에 비해 매우 적은 인구수이다. 그러나 우리 진주 소씨는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정통성을 가진 씨족인 것이다.

  우리 소씨 조상은 시베리아 바이칼(風州) 지역 일대에서 기원전 4241년 소복해(蘇複解)님에 적제(赤帝) 우두머리 지배자가 되어 부족을 다스려오고 그 후손들이 차츰 남하하여 소풍(蘇豊)이란 조상님이 기원전 2392년에 만주의 가장 중심지 하얼빈·소성(蘇城) 일대 광역지역에서 통치자가 되시었다. 그 후에는 계속 자연환경이 좋고 식량자원을 얻기 쉬운 곳을 따라 한반도에까지 내려와서 부족 사회연맹을 세워 통치자가 되었다. 진한은 초창기 황해도 재령평야(재령강 주변일대) 이남을 장악하여 세워졌었는데 기원전 209년에 소백손(蘇伯孫)님이 진한 시왕(始王)이 되었다.

  변한은 낙동강 하류지역에 12개의 커다란 부락이 모여 이루어진 나라인데 이때 지배자 왕 역시 소구야란 왕이다. 그 왕자는 소나갈신지(蘇那葛臣智)라 하는데 매우 어진 사람이었다고 한다.(이 사료는 필자가 2003년 하계(夏季)에 발굴한 것으로 이상옥 저 한국의 역사대전집 조광출판사 간으로 197쪽에 수록되었고 1980.3.10에 출판되었다). 신라 개국 공신 소벌(蘇) 즉 소벌도리(蘇都利) 공(公)이 종족의 맥을 계승해왔으며 신라 900여 년간도 호족과 귀족으로서 계통을 이어 오던 중 진덕왕(眞德王) 때 소알천(蘇閼川) 즉 소경(蘇慶) 공(公)은 각간(角千) 상대등(上大等)의 벼슬자리에 계시다가 말년에 진주로 이거하시어 사시니 이 분이 진주 소씨 시조 어른이시며 나의 혈통(血統) 조상 할아버지이시다.

3. 조상에 관련된 사료연구

  우리 소씨 성의 소(蘇)자를 무궁화 소 또는 살아날 소라 칭하였다. 관련된 이유는 풍주(風州) 임금 소복해(蘇複解)님은 무궁화(無窮花)를 풍주 지역에 많이 식재하여 소(蘇)자의 성(姓)에 무궁화소란 뜻음을 달게 한데 비롯되었다고 한다. 근래는 무궁화의 식생(植生)은 북한계선(北限界線)이 멸악산맥 이남이지만 만년 전에는 바이칼 즉 풍주 지방이 기온이 온난하여 무궁화가 잘 자생 번식하였음을 짐작할 적에 앞서 살핀 사실이 타당성을 높인다.

  종족의 유적이나 사료를 발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근래 자료는 이미 많이 조사 발굴 발표가 된 바 있지만 고대 사회의 진주 소씨 조상의 유적과 사료는 오랜 역사 세월 속에 소멸되었거나 왜곡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깊은 곳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기적으로 진주 소씨 상상원류계(上上源流係)는 충적세의 구석기 말기 문화시대라서 구전(口傳)되어 오던 사료를 문자시대가 오면서 기술된 것이며 지역의 유적이나 사료는 러시아 바이칼이나 중국 하얼빈인 다른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 지역에 있는 것을 찾아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라서이다. 다만 진한과 신라 시대의 소씨 조상에 관한사료는 지금 알려진 역사 사실보다는 더 많이 접해볼 가능성이 있음직하다.

  사료들을 성격적으로 나누어 보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연의 삼국유사,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지나칠 정도로 중국에 사대적(事大的)이어서 핵심을 잡기가 어렵고 신라본기, 고려사, 제왕운기, 동국역대사, 단기고사, 동국역대 회보문헌고비 등등의 역사서는 보다 더 주체적이지 못하여 허술한 면이 많으며, 중국의 눈치를 많이 살피면서 기술한 점이 있다. 중국의 옛 역사서인 한서 후한서 신당서 후당서 위지 등등은 고조선 이후 한민족사를 자국의 종주관계 또는 속국의 입장에 사료로 편협되어 기술되어 있다. 사실이 이러했으니 이러했을 것이다의 추측사실을 정사화(正史化)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 고전역사서 역시 자주적 입장에서 또 이웃나라 역사를 멸시해보는 방향에서 기술하여 한민족 역사를 바르게 기록해 놓았을 리가 만무하다. 일본의 왕립 도서관은 국제사회가 개방화 다양화되었는데도 일본 몇몇 관료 이외에는 절대 타인의 입실을 불허한다하니 필경 그 도서관 안에는 공개되면 안 될 만한 사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민족의 유래와 형성과정 등 관련된 좋은 자료가 있을 법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곳 사료를 보기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진한, 변한, 신라 등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유적지 사적지가 미미하게나마 알려진 게 다수가 있다. 소백손 공의 월성군 역사 유적지와 금척리(金尺里)의 42기 고분 가운데에 금척(金尺)의 매장지 하며, 소벌도리님 집터와 관련된 것이라든지, 창림사지(昌林寺址)의 삼층석탑과 쌍두구부(雙頭龜趺)에 얽힌 소씨와의 관계 자료 등 발굴 연구할 과제가 많다. 그뿐 아니라 영일군의 소정승 묘와 관련사료, 진주 선학산(仙鶴山)의 소유권 변동 등등이 지나온 전란 중에 어떤 과정을 거쳐 바뀌었는가, 그뿐인가 진주시청의 행정구역 제정에 있어 극히 비상식적인 하대동(下大洞)이란 지명 명칭도 수정되어야 할 것이며, 하동에 하마비(下馬碑)는 언제 어디로 가서 없어 졌는가 조사 밝혀져야 할 것들이 많다. 또한 우리는 조상님들의 역사적 유적과 사료 발굴도 중요하지만 현재 존재해 있는 유적과 사적 등을 관리 보전하는 것도 또한 중요한 일이며 우리 후손들이 하여야 할 의무가 아닌가 지적해 본다.

  유적, 사적, 사료를 연구 발굴하며 관리 보존하는 데는 우리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지식인의 인적자원과 무한히 필요한 종중의 예산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가슴 아프기 한량없다. 문중일가가 지혜롭고 슬기로우며 부귀와 권세를 누려 긍지와 자부심으로서 진주 소씨 후손됨의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진주 소씨 모두가 사명감을 갖고 힘차게 살면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데 총력을 다합시다.

                                      2004년 12월 15일 前 중등교장 소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