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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조 판서공 휘 효식 유사(判書公 諱 效軾 遺事)
작 성 자 운영자 작 성 일 2010-02-12 13:50:13

진주소씨29세조 판서공 휘 효식 유사(判書公 諱 效軾 遺事)


공(公)의 휘는 효식(效軾)이요. 자(字)는 자범(子範)이니 진무부위 중군시정 휘 희(振武副尉 中軍寺正 諱 禧)의 큰아들이다. 단기 3771년(서기 1438년) 세종(世宗) 20년 무오년(戊午年) 8월에 낳으셨다. 단기 3793년(서기 1460년) 경진년(庚辰年)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한성부 판관(漢城府 判官)이 되었다. 중종(中宗) 30년(단기 3851년)에 수직(壽職 : 나이가 많은 분에게 주는 벼슬)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받았으며, 둘째아들 기파(起坡)가 경상병사(慶尙兵使)가 되니 그로 인하여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을 추증(追贈) 받았다.

단기 3870년(서기 1537년) 중종 32년에 손자 세양(世讓)이 훌륭하게 되니 이로 인하여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 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를 다시 증직(贈職) 받았다.

단기 3851년(서기 1518년) 무인년(戊寅年) 9월 28일 전주의 본가(本家)에서 병환으로 졸하니 수(壽)는 81세이다. 부인은 증 정부인 전주최씨(贈 貞夫人 全州崔氏)이니 진원현감 최여관(珍原縣監 崔汝寬)의 딸이다. 조(祖)는 이조정랑 진명(吏曹正郞 進明)이요, 증조는 찬성사 보문관대제학 완산부원군 만육 양(贊成事 寶文館大提學 完山府院君 晩六 瀁)이요, 시중 선능(侍中 善能)의 6세 손(孫)이요, 외조(外祖)는 전농소윤 전주 최덕지(典農少尹 全州 崔德之)이다.


부인이 병진년(丙辰年)에 출생하여 15세(庚午年)에 공과 혼인하여 아들과 딸 각각 셋을 낳았다. 큰아들 자파(自坡)는 도사(都事)요, 둘째아들(起坡)은 병사(兵使)요, 셋째아들 계파(繼坡)는 만호(萬戶)이다. 큰딸은 충무위 문세림(忠武威 文世琳)과 혼인하여 아들 1명 딸 3명을 낳았으며 둘째딸은 송보(宋普)와 혼인하여 딸 3명을 낳았다. 공의 사적(事蹟)은 묘지명(墓誌銘)과 묘갈명(墓碣銘)에 기록하여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묘는 완주군 이서면(完州郡 伊西面) 부모 산소 아래에 있으니 부인과 쌍분(雙墳)이다. 묘갈명(墓碣銘)을 조사해 보건데 공이 경진년(庚辰年) 젊은 시절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직(內職 : 중앙근무)과 외직(外職 :지방근무)을 두루 거쳤다. 내직으로는 오위(五衛)의 부장(部將)과 훈련원(訓練院)의 주부(主簿)를 역임(歷任)하였고, 외직으로는 용안(龍安), 흥양(興陽), 부안(扶安)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부안에 재임(在任)할 때 만기(滿期)가 되어 퇴직(退職)하려고 하니 현민(縣民)들이 공의 선정(善政)에 감동하여 다시 유임(留任)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조정(朝廷)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공은 이를 불구(不拘)하고 전주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종부시(宗簿寺)의 주부(主簿)라는 벼슬을 내려 소환(召還)하였으나 부임(赴任)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20여년 동안 대자연 속에서 자유로이 노닐면서 몸과 마음을 수양하다가 단기 3851년(서기 1518년) 중종(中宗) 30년 무인년(戊寅年)에 정3품직(正三品職)을 받은 다음 노환(老患)으로 졸하니 수(壽)는 81세였다. 같은 해 12월 17일(壬午年)에 용수산(龍水山)에 안장(安葬)하였다.


공의 둘째아들이 절도사(節度使)가 됨에 따라 공도 2품(二品)의 직을 증직(贈職) 받았다. 용안현지(龍安縣誌)에서 공의 사적(事蹟)을 조사해 보니 사재감 주부(司宰監 主簿)로서 본현(本縣)의 현감(縣監)으로 나와 청렴결백(淸廉潔白)하고 정치를 잘하였다.

특히 을사년(乙巳年)의 대흉년에 양식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곡식을 대여(貸與)하고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구호곡(救護穀)을 배포하는 등 흉년에 실시하는 정책을 잘 펴나갔다. 이를 본 감사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그 훌륭한 치적(治績)을 낱낱이 열거(列擧)하여 조정(朝廷)에 포상(褒賞)을 상신(上申)하였다.

이 때문에 병오년(丙午年)에 한성부 판관(漢城府 判官)으로 소환(召還)되었다. 용안(龍安)의 객사(客舍) 현판(懸板)에 점필재(佔畢齋)가 현관(縣官)에게 준 시(詩)가 있는데 내용으로 보아 공에게 기증(寄贈)한 것 같으며 용안의 남문 밖에 공의 유애비(遺愛碑)가 서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여지승람(與地勝覽)에는 ‘부안명관 본조 소효식(扶安名官 本朝 蘇效軾)’이라 기록되어있으니 공의 훌륭했던 치적(治績)을 짐작할 수 있다.

부안현지(扶安縣誌)에서 공의 사적을 조사해 보건데 갑인년(甲寅年)에 부임(赴任)하여 기미년(己未年)에 연세(年歲)가 60여세가 되었으므로 관직(官職)을 버리고 고향인 전주로 돌아갔다. 사람됨이 청렴(淸廉)하고 근신(勤愼)하며 일을 처리할 때는 분명하고 결단성(決斷性)이 있어서 6년 동안 관직에 있을 때 그 치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공이 사표를 낼 즈음에 읍인(邑人) 전정랑 김직손(前正郞 金直孫)등이 조정(朝廷)에 상소문을 올려 공의 유임을 청원(請願)하였으나 한번 정한 굳은 의지에 따라 끝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부안 현에서 공의 전주의 본가(本家)와는 거리가 50여리인데도 정월 등 명절(名節)등에는 현(縣)의 아전(吏)과 백성들이 반드시 찾아와 세배하고 안부를 살피고 가곤 하였다.


공이 졸하였을 때에는 현민(縣民)들이 찾아와 조문(弔問)하고 장례(葬禮)까지 치러 주었다. 현의 객사(客舍)에는 공의 이임(離任)을 섭섭하게 여기고 그 은덕(恩德)을 감사하는 거사비(去思碑)가 서 있었다.

흥양현지(興陽縣誌)에서 공의 사적을 조사해 보면 무신년(戊申年)에 도임(到任)하였다가 임자년(壬子年)에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로 소환(召還)되었다. 청렴결백(淸廉潔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민폐(民弊)를 일체 근절시키니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그 뒤에 공이 손자 세득(世得)과 증손자 연(連)이 본현(本縣)에 부임(赴任)하였는데 또한 선치(善治)로써 이름을 떨쳤다. 성(城)의 북문 밖에는 공의 은덕(恩德)을 찬양하는 유애비(遺愛碑)가 있다. 다시 한번 더욱 자세히 조사해 보건데 공은 무오년(戊午年)에 출생하였으며 부인은 병진년(丙辰年)에 출생하여 경오년(庚午年)에 서로 결혼하였으니 공의 연령은 13세였다. 큰아들 찬성공(贊成公)이 임신년(壬申年)에 태어났으니 공의 연세 15세 때였다. 공이 이처럼 일찍 결혼한 것은 어렸을 때 부친을 잃어 가정이 혼란했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만년(晩年)에는 자손이 번성하여 팔십여명에 이르렀으니 착한 일을 하면 뒤에 좋은 경사스런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최부인(崔夫人)의 졸년(卒年)이 전해지지 않는데 찬성공(贊成公)이 구례현감(求禮縣監)으로 전보(轉補)된 것은 부모의 봉양(奉養)을 위해서 자청(自請)한 것이다. 또한 그 뒤 병술년(丙戌年)에 곤암공(困庵公)이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군현(郡縣)의 수령(守令)을 자청하였을 때에도 조부모님이 계셨다고 하니 부인이 생존해 계셨던 것이며 그때 연세가 91세였다고 한다. 혹은 첨사공(僉使公)이 복(服)을 입고 있었던 중 별세하였으니 이는 곧 반드시 부모가 안 계셔서 손자가 조부모의 복을 입은 것이다.


그렇다면 부인의 연령이 103세인데 64세의 손자가 복을 입은 것이니 그 많은 나이는 옛날에도 들물었던 일이라고 할 것이다. 첨사공(僉使公)은 갑오년(甲午年)에 출생하여 정유년(丁酉年)에 별세하였다. 공이 생존했을 당시에 곧 아들인 찬성공(贊成公)에게 익산(益山)으로 이사 가서 살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찬성공이 감히 공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익산에 왕래는 할지라도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결단을 내려 실행하지 못했다. 공이 별세한 뒤에 찬성공이 3년상(喪)을 마친 뒤에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익산으로 이사하였다. 대대로 전해오던 가옥 토지 노비(奴婢)등은 모두 병사공(兵使公)과 만호공(萬戶公)에게 분배하여 주어 그대로 살게 하였다. 병사공이 별세하자 공의 묘 앞에 편히 장사를 모신 뒤에 그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수호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중간에 착실히 산소를 수호하지 않고 제사에도 성의가 없으며 공의 산소 근처에 몰래 침범하여 장사하는 사람도 있게 되었다.

후손인 직장 동명(直長 東鳴)이 문장종중(宗中)에 제의(提議)하여 성의가 없는 자손에게 위임하지 않고 익산 사는 여러 자손들이 주관(主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제전(祭田)을 다시 마련하였으며 해마다 제사를 한번만 지내면 자손들이 성묘(省墓)를 게을리 할 염려가 있다 하여 네 차례의 명절(名節)에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다만 한식(寒食)과 추석(秋夕)에는 제사를 지내고 설날과과 단오(端午)에는 음식을 올리기만 하기로 하여 지금까지 그대로 실행하고 있다. 옛날에는 산소 근처에 촌락이 없었으며 산직(山直)이집이 해량촌(蟹梁村)에 있어서 산소 주변의 수목(樹木)을 보호 육성하며 제물(祭物)을 운반하는 데에 매우 불편하였다. 계유년(癸酉年) 봄 3월에 후손 득천씨(得天氏)가 문중 유사(門中 有史)로 있으면서 김제에 사는 일가 철(澈)등과 협력하여 재각(齋閣)을 산소 아래에 건립하였다. 이에 따라 산직(山直)이를 두어 제물을 비롯하여 모든 일을 재각에서 마련하도록 하였다.


옛날에 종산(宗山)을 보호 육성하는 데에 소홀하여 산소 좌우의 산등성이의 아래까지 몰래 장사하는 사람이 많아 공동묘지와 방불하게 되었다. 혹은 산소의 뒤에 장사하거나 혹은 지극히 가까운 곳까지 침범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이장(移葬) 시키지 못하니 조상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한량없다. 산소의 오른쪽 산등성이에는 공의 큰따님과 사위 문세림(文世琳)의 쌍분(雙墳)이 있으며 왼쪽 산등성이에는 병사공(兵使公)의 아들 세인(世仁)의 묘가 있다.

이는 당시 허락하여 장사한 것이며 다른 무덤들은 아마 후손들이 몰래 계속해서 장사한 것이다. 지난 무술년을 전후하여 종로(宗老) 상설씨(相卨氏)가 문장(門長)으로 있을 때에 종인(宗人)들과 협의하여 이후부터는 산소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 산등성이의 원근(遠近)을 막론하고 일체의 장사를 금지케 했다. 만일 강제로 장사하는 일이 있다면 법에 의한 해결을 기다리지 않고 종중(宗中)에서 파내어 이장토록 의결하였다. 일제(日帝)의 초기에 후손이 산직(山直)이로 있으면 수호할 때에 산장(山庄)을 일본 사람들에게 저당을 잡히고 돈을 빌려 쓴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돈을 상환(償還)하지 못하여 일본 사람들이 이 종산(宗山)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려 했다. 자손들이 모두 궐기하여 후손 진남(鎭南)을 종중의 대표로 내세워 재판을 대행(代行)케 했다. 각자 비용을 거두어 충당함과 동시에 매 재판 날마다 자손들이 운집(雲集)하여 재판정이 초만원을 이루니 벌명당을 건드려서 이렇게 되었다고들 했으며 마침내 재판에 승소(勝訴)하여 산장(山庄)을 되돌려 받았다. 이에 수호비를 세웠다.

진주소씨대동보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