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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평공(康平公) 휘 격달(諱 格達) 유사(遺事)
작 성 자 운영자 작 성 일 2009-02-15 18:43:34

강평공(康平公) 휘 격달(諱 格達) 유사(遺事)

공(公)의 휘(諱)는 격달(格達)이요 자(字)는 유달(有達)이며 호(號)는 모은(慕隱)이고 관(官)은 고려국 대장군(高麗國 大將軍)이니 신라국 강주도독(康州都督) 소송(蘇淞)의 유복자(遺腹子)로 단기 3224년(서기 916년) 병자년(丙子年) 9월에 악양(岳陽)에 고소산성(姑蘇山城)을 축성(築城)하고 하동태수(河東太守)가 되었다. 이때에 모친 정효부인 김씨(正孝夫人 金氏)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이 예하였던 왕봉규(王逢規)와 차윤웅(車閏雄)의 작조로 이들에게 사살(死殺)되었음을 알리고 때가 되면 부(父)의 원수를 갚으라 했다.

당시 왕봉규와 차윤웅은 강주 지방에서 큰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께서는 역부족함을 자각하고 세력 증강을 위하여 고숙(姑叔) 최유문(崔有文)과 함심하고 호족(豪族) 원서(元瑞) 이중인(李重仁) 안유생(安有生) 박옥헌(朴玉憲) 김수봉(金秀峰)등을 규합하여 강주땅 일부를 흡수 및 점령하고 남해태수 손평조(孫平朝), 고성태수 박명훤(朴命萱), 함안태수 윤선(胤宣), 거제태수 낙창(洛昌), 천령태수 배한내(裵韓乃)등 5개지방 태수들과 연합하여 일차로 차윤웅(車閏雄)을 제거한 후에 거창태수 한기열(韓基烈)의 딸 화영부인(和英夫人)과 혼인하였다. 당시는 후고구려와 후백제등이 창건(創建)되어 북방에는 발해(渤海)가 있고 또 후고구려 궁예(弓裔)를 없애고 일어난 고려태조 왕건(高麗太祖 王建)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전라도 지방에서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백제의 옛 땅을 기점으로 신라를 정벌(征伐)하여 통일을 도모코져 야심을 품고 각지에서 빼앗고 뺏기는 전투로 대단히 혼란한 시기였다.

단기 3253년(서기 920년)10월에 후백제의 견훤은 고려와는 화해를 하는 양으로 안심시키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陜川지역)을 침공하여 신라군을 몰아냈고 신라군은 거창 진주 산청 등지로 후퇴하였다. 이때에 조모(祖母) 송로부인(松路夫人)은 공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구시목(九柿木)은 이미 죽었고 신라는 이제 국운이 다하였으니 고려(高麗)에 들어가야 다시 가문이 대대로 융성한다.”하는 말을 하고 고려에 합병할 것을 극권 하였다. 이때에 신라는 내외 정세가 극도로 혼란하여 국력이 쇠잔할 뿐 아니라 불구대천(不俱戴天)인 아버지의 원수(怨讐)를 갚기 위해서는 고려에 합류해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고 단기 3259년(서기 926년)춘절에 장졸(將卒) 1,000여명과 관할 지역을 고려국에 귀속(歸屬)시키게 되었다. 고려왕은 환영하면서 공에게 공적을 찬양하고 고려국 장군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그 지역 그 백성을 계속하여 다스려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듬해인 단기 3260년(서기 927년) 격달장군은 고려태조로 하여금 강주(康州 : 현 진주지방)를 정벌하도록 하고 공께서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강주도독 왕봉규(王逢規)를 죽여 원수를 갚는 한편 강주를 점령하게 되니 고려태조 왕건(高麗太祖 王建)의 신임(信任)은 더욱 두터워지게 되었다. 신라 고려 후백제는 정립(鼎立)하여 영토확장을 위하여 좌충우돌(左衝右突)하는 전쟁이 끝날 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고려와 후백제는 상호 견제하고 있는 중 그해 9월 후백제는 경북 북부지역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군사를 돌려 신라 수도 경주를 침략하게 되었다. 이 급보를 받은 신라조정은 고려국에 구원병을 청하고 포석정(鮑石亭)에서 왕족과 충신들이 연회를 하고 있을 때 후백제군이 습격하여 신라 경애왕(景哀王)과 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포석정의 비극)후백제에 충성토록 하는 일방 김부(金傅)를 왕으로 삼으니 이가 곧 경순왕(敬順王)이다. 뒤늦게 도착한 고려 구원병은 공산성에서 후백제군과 교전하였으나 고려군은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등이 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보고 후퇴하여 왕건은 개경(開京 : 지금의 개성)으로 돌아갔다. (고려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통탄하고 그의 상(像)을 금으로 만들어서 시체와 함께 매장한 삼묘가 있다. 금상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분묘를 셋을 만들어서 영원히 보전하게 하였다고 한다)

후백제 견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고려를 정벌하고서 단기 3263년(서기 930년) 1월에 동북방 고창군(古昌郡 : 지금의 安東)으로 출진하자 고려 왕건은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운명의 대결전에 들어가 후백제군 8,000여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게 되었으니 후백제군은 크게 패하고 서남방면으로 퇴진하게 되었다. 고려 왕건은 이 전투를 승리(勝利)로 이끌게 한 고창성주 김선평(金宣平)에게는 대광(大光 二品)을 주고 모든 군사들을 크게 치하였으며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삼국천지(三國天地)의 대세(大勢)가 기울어서 천하인심(天下人心)이 고려국에 집중되고 태조왕건(太祖王建)의 선정(善政)과 덕행(德行)이 사방(四方)에 알려지자 영안(永安 : 豊山), 하곡(河曲 : 안동근처), 송생(松生 : 靑松)등 30여군현과 명주(溟州 : 江陵), 흥례(興禮 : 蔚山) 등 110여성이 고려에 복종 귀속(服從 歸屬)하게 되었다.

단기 3267년(서기 934년) 태조 17년에 정복하기 어려운 운주성(運州城)을 진격(進擊)할 때에 공께서는 지략(智略)과 용기(勇氣)로써 운주성을 함락(陷落)하니 태조는 격달공의 공적을 가상하여 대장군으로 승진(昇進)시키고 국가의 모든 행사와 회의에 공을 참여하게 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다음해인 단기 3268년(서기 935년) 10월 고려태조는 재암성주 선필장군을 시켜 신라와는 더 이상 싸우지 말도록 하고 고려 태조께서 경주를 방문하도록 외교 통로(外交 通路)를 주선하게 하였다(降伏을 勸誘) 신라 경순왕(敬順王)은 군신회의(君臣會議 : 和白)를 열고 “이 나라는 대부분의 영토(領土)을 잃어 일개 군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인국(隣國 : 이웃나라)의 침략(侵略)이 있을 경우 항전할 국력이 없으니 국가를 지탱하기가 도저히 어렵다. 그러므로 고려에 귀속(歸屬)하여 신라국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이 상책이다.”고 제의 하였다. 이때 태자(太子 : 麻衣太子)와 일부 장군들이 반론을 전개하였으나 경순왕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과인(寡人)이 화해(和解)를 위하여 고려국을 심방(尋訪)하였을 때에 정중(鄭重)한 예우(禮遇)를 받은 사실이 있다고 말씀하고, 또 아들에게 몰려 고려국에 망명(亡命)한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후대(厚待)를 받으면서 왕건(王建)을 돕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결단(決斷)을 내려 고려에 귀속(歸屬)하게 되니 신라는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창건(創建)한 이래 56대왕 992년만에 국권(國權)이 상실(喪失)되었다. 신라 태자는 개골산(皆骨山 : 金剛山)에 들어갔다고 하는 유명한 마의태자(麻衣太子)이다.

한편 후백제는 영토도 광활하고 군사도 막강하였으나 견훤(甄萱)이 넷째 아들 금강(金剛)을 편애(偏愛)하자 장남 신검(神劍)이 양검 용검과 합세하여 단기 3267년(서기 934년) 견훤왕을 폐위(廢位)시키고 신검이 후백제 2대왕에 오르면서 부왕(父王)을 금산사(金山寺)에 억류(抑留)시켰으나 견훤은 탈출(脫出)하여 고려국에 투항하게 되자 고려 왕건은 유금필(庾금弼)로 하여금 견훤을 맞이하여 개경(開京 : 開城)에서 안일(安逸)하게 거주(居住)하도록 환대(歡待)하였다. 후백제 왕실(王室)의 내분(內紛)은 확산되어 견훤의 사위 박영규(朴英規)가 고려에 투항하니 후백제에는 신검의 부하 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은 마지막으로 후백제 정벌을 위하려 십만대군(고려군 4만3천, 지방호족, 발해유민군 등 4만4천여명)을 집결하여 단기 3269년(서기 936년) 9월에 좌군, 우군, 중군으로 편성하여 출정(出征)함에 처음에 천안부(天安府)를 거쳐 인선(善山)으로 진격(進擊)하자 후백제군 일부는 왕건과 동행한 견훤의 목소리를 듣고 많은 군사가 투항하고 3,200여명은 생포(生捕)하였으며 5,700여명은 사살되는 등 신검(神劍)군은 패전(敗戰)에 패전을 거듭하는 비운을 안고 완산(完山 : 全州)으로 퇴각하였고 고려군은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마성(馬城 : 건산 黃山)에 이르게 되니 후백제 2대왕 신검도 할 수 없이 항복함으로써 2대 36년(견훤이 건립한지 45년)만에 후백제는 끝을 맞이하게 되고 말았다. 고려태조 왕건은 완산에 들어가 신검의 항복을 받은 후에 직제(職制)와 군령(軍令)을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와 위봉루(威鳳樓)에서 문무백관(文武百官)의 하례(賀禮)를 받고 건국(建國) 19년만에 민족통일(民族統一) 대업 완수(完遂)를 축하하였다.

고려 태조는 단기 3251년(서기 918년) 6월 15일 즉위시(卽位時) 공로가 많은 홍유(洪儒 : 弘述), 배현경(裵玄慶 : 白玉), 신숭겸(申崇謙 : 三能山), 복지겸(卜智謙 : 卜沙遺) 등을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시상하였고 그후 단기 3269년(서기 936년) 후 삼국통일에 공이 많은 대장군 소격달(大將軍 蘇格達)에게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 봉(封)한 것으로 보아 공의 공적이 찬란하였던 것을 알수 있다.

통일 후 고려 태조는 대장군(大將軍) 대상(大相) 등 통일공신들을 직위에 맞는 훈공이 내려졌을 것이나 다른 문헌에는 기록이 없고 진주소씨족보(晉州蘇氏族譜)에 그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 태조는 옛 고구려의 후예(後裔)임을 자부(自負)하고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를 회복(回復)하기 위한 북벌정책(北伐政策)과 후세를 위한 정성(政誠) 1권과 계백료서(誡百僚書) 8권을 저술(著述)하여 반포(頒布)하였다고 한다. 이것 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고려사에 공(公)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강평공(康平公 : 格達)은 3274년(서기 941년) 신유에 진주소씨대동보(晉州蘇氏大同譜)를 주창(主唱)하여 매년 거론되다가 마침내 단기 3280년(서기 947년) 정미년(丁未年)에 동근보(東槿譜 : 일명 天福譜)가 발간되었으니 도주사(都主司)는 휘 격달(格達)이요 서문(序文)은 대문장가(大文章家) 휘 문(汶)이 찬(撰)하였으며 그후 25세 휘 약우(若雨)가 번역(飜譯)한 동근보(東槿譜)가 전해지고 있어서 우리 씨족사(氏族史)에 귀중한 자료(資料)가 되고 있다.

공(公)은 단기 3278년(서기 945년) 을사년(乙巳年)에 관직을 사임(辭任)하고 고향인 소촌(蘇村)으로 내려가서 청안(淸安)하게 생활하다가 단기 3316년(서기 983년) 고려 성종(成宗) 2년(癸未年) 6월 10일에 별세하였다. 그후 11대 문종(文宗) 즉위 11년에 공을 태부(太傅)로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강평(康平)으로 명명(命名)하였으며 15대 숙종(肅宗) 즉위(卽位) 7년 임오년(壬午年)에 증산산성(增山山城 : 姑蘇山城) 아래에 낭열사(郎烈祠)를 하사(下賜)하였다.  

<벽상삼한공신 소격달장군과 열녀(烈女) 정효부인 김씨(正孝夫人 金氏)를 추모하는 뜻으로 고려 조정에서 정려를 창건할 것을 명령하였음>  

참고문헌 : 구인사지(九印祠志), 구장지(九將志), 낭열사기(郎烈祠記), 대한국사(大韓國史),고려왕조실록(高麗王朝實錄), 고려사(高麗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