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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奈麻) 휘 귀산공(諱 貴山公) 유사(遺事)
작 성 자 운영자 작 성 일 2009-02-12 18:18:01

 

내마(奈麻) 휘 귀산공(諱 貴山公) 유사(遺事)

 

 

공(公)의 휘(諱)는 귀산(貴山)이니 진주소씨 시조 신라국 상대등공 휘 경(晉州蘇氏 始祖 新羅國 上大等公 諱 慶)의 둘째 제씨(弟氏)이고 신라국 장군 아찬 휘 휴곤(新羅國 將軍 阿湌 諱 休昆 ;일명 武殷)의 오형제 중 셋째이니 신라국 세속오계명(新羅國 世俗五戒命)을 받으신 분이시다. 공(公)은 화랑(花郞)으로서 혼탁(混濁)하고 어지러운 나라의 현실(現實)을 걱정하고 인간으로서 정신적 지표를 삼기 위하여 평소 교분이 두터운 낭도 추항과 함께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와 교류하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잘 닦지 않는다면 반드시 치욕(恥辱)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현자를 찾아 가서 올바른 도리를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상의하고 진흥왕(眞興王) 3년에 출생하여 중국(당시 진나라 수나라)에서 불경(佛經) 연구와 자신이 통달한 불교(佛敎)의 대가(大家) 원광법사(圓光法師)를 찾아가 계명(戒名)을 받기로 하고 마침 가실사(嘉悉寺)에서 면벽수도(面壁修道) 중인 원광법사를 찾아 갔으나 문전에서 거절 당하자 두 낭도(郎徒)는 문밖 뜰에 꿇어 앉아 교훈(敎訓) 받기를 간청(懇請)하던 중 폭설이 내리어 가슴을 덮고 혹한(酷寒)이 몰아 닥쳤을 때 공은 손가락을 절단하여 법사(法師)에게 드리도록 하였으며, 단지(斷指)한 손에서 나온 피가 눈을 적설(赤雪)로 물들이자 원광법사는 비로소 이들을 맞아 들였다.

 

원광법사는 “그대들은 누구인가? 승려(僧侶)인가?”고 물었다. 낭도들은 “아닙니다. 저희들은 낭도(郎徒)들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아 왔는가? 이곳은 그대들 낭도들이 무예(武藝)를 닦는 도장(道場)이 아니지 않는가?”하고 법사는 불법(佛法)을 배우고 도(道)를 닦아 돈오(頓悟)의 경지(境地)를 찾는 불도(佛徒)가 아니고 화랑도(花郞徒)임에 더욱 의아해 하였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손가락을 잘라 피로 물들였단 말인가?”하고 묻자 공(公)은 “일찌기 달마대사(達磨大師)께서 소림사에 가서 9년간 면벽수도(面壁修道)하실 때 신광(神光)이 찾아와 법(法)을 청원(請願)하였으나 아직 때가 이르다고 만나 주지를 않아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폭설과 한파가 닦쳐 오자 신광(神光)은 팔을 잘라 자신의 결의를 표명하였으니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단지적설(斷指赤雪)이라고 이르고 있습니다.

 

법사께옵서 저희들의 친견(親見)을 불허하였던 것은 바로 저희들에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였기에 그러하신 것으로 알고 어깨를 베일 수 없어 손가락만을 잘랐습니다.”하고 대답하자 법사는 다시 “그러면 어깨를 베일 것이지 어찌하여 손가락만을 베었단 말인가?”하고 묻자 “법사님을 뵈올 수 있다면 어깨뿐 아니라 팔과 다리도 다 베일 수 있습니다. 다만 손가락을 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저희들은 화랑의 무사로서 앞으로 있을 국난을 맞이하여 싸움터에 나아가 국가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기 위하여서는 팔과 다리가 온전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손가락은 없어도 칼과 활은 사용할 수 있는 고로 손가락만을 자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과 추항이 법사(法師) 앞에 부복 사례(俯伏 謝禮)하고 “속(俗)된 저희들은 어리석고 아는 바 없사오니 원(願)컨데 한 말씀 가르침을 주시면 죽을 때까지 계명으로 삼고 잘 지키겠습니다.”고 간절(懇切)한 소망(所望)을 말하자 원광법사(圓光法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말을 잘 들어라. 젊은 화랑(花郞)들이여, 앞으로 강과 산은 변하고 물과 흙은 진토가 되어 사라질지 모르나 내 말은 연년세세(年年歲歲) 그대로 남아 몇 천년 후에도 영원히 받들어 이어져 내려갈 것이다.” 불도(佛道)에는 보살계(菩薩戒)라고 해서 열 가지 지켜야할 계율(戒律)이 있으나 이것은 자네들같이 임금을 모시는 신하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 어려울 것 같네, 그래서 지금 세속(世俗)에 알맞은 다섯 가지 계율(戒律)을 일러 줄 것이니 잘 이해하고 평생 이행하도록 하게 첫째 임금섬기기를 충성(忠誠)으로 하고 둘째 어버이 섬기기를 효도(孝道)로써 하고 셋째 벗 사귀기를 신의(信義)로써 하고 넷째 전쟁에 나가서 물러섬이 없어야 하고 다섯째 살생을 함부로 하지 말것(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 불신도의 십계에는 살생이 금지되어 있으나 법사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오계를 받지 않고 위의를 닦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땅히 칼이나 활을 들고 청정 비구를 수호하여야 한다고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대들은 이 다섯 가지를 소홀히 여기지 말고 잘 지키도록 하게”하였다. 공과 추항은 법사의 교훈을 충실히 지킬 것을 맹서하고 돌아왔다. 2년 후인 임진년 진평왕4년(602년)에 백제(百濟)가 쳐들어와 아막성(阿莫城)을 에워싸고 공격하므로 왕은 귀산공의 부친 아찬 무은장군(阿湌 武殷將軍)과 건품장군(乾品將軍)에게 명령하여 토적(討敵)하도록 하였다. 이때 공과 추항은 소감(少監)이라는 직함으로 출전하여 전투에 나가게 되었는데, 백제군(百濟軍)은 전략으로 패한 척 후퇴하고 천산(泉山)에서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리고 있을 때 신라군이 추격하자 백제군이 일시에 출격하여 신라군은 큰 피해와 혼란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공과 추항은 원광법사(圓光法師)의 교훈(敎訓) 임전무퇴(臨戰無退)을 외치며 적진(敵陣)으로 돌격(突擊)하자 이를 본 신라군은 어린 화랑들의 용기에 감격하여 뒤를 따라 공격하여 백제군을 퇴각시켰다. 그러나 공과 추항은 적진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회군 도중 사망하였다. 이 비보를 들은 진평왕(眞平王)은 아나(阿那)까지 마중 나와 이 젊은이들의 충혼(忠魂)을 위로(慰勞)하고 공에게는 내마(奈麻)를 추서(追敍)하고 추항에게는 대사(大舍)를 추서(追敍)하였다.

 

이로부터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공과 추항에게 가르쳐 준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신라국민들의 생활신조가 되고 화랑도에게는 화랑오계로 삼게 되어 이를 실천함으로써 지략강병(智略强兵)이 배출(輩出)되어 신라의 삼국통일대업(三國統一大業)의 원동력이 되었다. 공은 부 휴곤(父 休昆 : 일명 武殷) 조부 광종 대아찬공(祖父 光宗 大阿湌公)등 대대(代代)로 신라국공신(新羅國功臣)의 명문(名門)에서 생장(生長)하였으며 장형 휘 경(長兄 諱 慶)과 같이 국선(國仙 ; 花郞徒)으로 심신(心身)을 연마(硏磨)하였으며 장래유망(將來有望)한 수재(秀才)였으나 천유무심하여 방년 17세에 천산전투(泉山戰鬪)에서 신라국(新羅國)을 승전(勝戰)케 하고 전사한 위대(偉大)한 공적(功績)을 남긴 분으로 화랑(花郞) 관창(官昌)과 함께 화랑도(花郞徒)를 빛낸 분이다.

 

[진주소씨 대동보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