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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씨의 내력
작 성 자 운영자 작 성 일 2010-11-17 13:03:09

이글은 진주소씨 회지 44호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저자의 승인을 받아 옮긴 것입니다.

중국 소씨(蘇氏)의 내력

                                                                     글쓴이 : 대종회 부회장 소병석

  지난 여름 중국을 여행하면서 틈틈이 소씨에 관한 자료를 물색한 결과 다행히 성씨연구회에서 중국 소씨에 관한 내력을 입수하였기에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소씨는 중국의 성씨 중 41번째로 많다. 옛 고서에 의하면 육종의 장자 곤오공의 후대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사마천 사기 초세가의 기록에 의하면 육종은 전욱 고양씨의 현손이었고 6명의 아들 중 장자가 곤오공이였다.

  집해(集解)라는 책에는 곤오공의 이름은 번(樊)이고 성은 기(己)씨이며 곤오(昆吾) 나라에 봉해져 호가 곤오가 되었다. 곤오공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라 중엽에 소(蘇)로 봉해졌다.

  죽서기년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라 임금 괴(槐) 33년 곤오의 아들을 유소에 봉해져 유소씨라고도 한다. 소나라의 도성에 대하여 사해(辭海)의 기록에는 지금의 하남 제원 서북에 있다 하고, 지명사전에는 하북 임장현 서쪽에 있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하남 휘현시 소령에 있다고도 한다.

  주(周) 무왕은 곤오공의 후손 분생(忿生)을 사관(司冠)으로 봉하여 형벌과 감찰을 담당케 하였는데 형벌이 공평하고 백성을 잘 다스려 소나라 왕으로 봉했다. 분생은 도읍을 온(溫)으로 옮겨 온씨라고도 칭한다.

  관련된 역사책과 소씨 족보에 의하면 소씨는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顯) 무척(武陟) 심양(沁陽) 일대에 대대로 살아왔다. 진나라 때는 일부가 호남, 호북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동주의 낙양에 일부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춘추시대 초장왕에게는 대부(大夫) 소종(蘇從)이 있었고 전국시대에는 낙양 출신 소진(蘇秦), 소대(蘇代), 소역(蘇繹) 삼형제가 있었다. 한나라 초에는 통일천하를 잘 다스리기 위하여 인구를 재배치했는데 이 때 소씨의 일부는 무공의 두릉(武功 杜陵)으로 옮기고 후에 일부는부풍 평능(扶風 平陵)으로 옮겼는데 모두 큰 부족으로 발전하였다.

  무공(武功) 소씨의 일부는 서진(西晉) 말엽에 양양에 거주하였고, 일부는 섬서성의 남전(藍田)에 거주하였다. 부풍(扶風) 소씨의 후손은 한단(邯鄲)에서 관직을 하고 현지에서 정착하여 조군(趙郡) 소씨를 형성하였다. 오호 16국 시대에 중원 토족이 대부분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소씨도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 정착하였다. 당나라 때 조군 소씨의 일부는 사천성으로 옮기고 하남 소씨는 일찍이 두 번이나 복건성으로 옮겼다. 한번은 초기 진정(陳政), 진원광(陳元光) 부자를 따라 민(閔)나라에 들어가서 장주(章州)를 만들었고, 한번은 당나라 말기에 민나라에 들어가 정착하여 큰 부족으로 발전하였다.

  일찍이 호남신화(湖南新化) 안화매산(安化梅山) 일대의 소씨는 매산만(梅山蠻)으로 불렸으며, 일부는 요족(搖族)으로 융화되었다. 북송 희령(熙寧) 5년(1072) 장돈(章惇)이 매산만을평정하고 많은 사람을 살육하였다. 소씨는 다행히 살육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광서성, 광동성, 운남성으로 도망하고 일부는 베트남, 라오스, 태국 북부산악지역으로 피난하였다. 북송 때 선화진사(宣和進士) 소흠(蘇欽)은 가보와 족보를 작성할 때 선유남문, 홍화함두, 천주, 진강, 동안, 남안, 탑구, 영훈, 용계, 대만 각처에 흩어져 거주했다고만 했다. 북송 때부터 이미 소씨족이 대만에 이주하여 살았다. 명청(明淸) 양대에 더욱 많은 소씨들이 대만에 들어가 살았고 일부는 정성공이 대만을 수복할 때 따라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 후 이들 중 일부는 동남아시아와 유럽과 미국 등 나라에 이주, 화교가 되었다. 소씨는 중국 문명과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헌했으며 수 많은 저명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전국시대 소진은 종횡가로서 낙양 사람이며 다재다능한 종합적인 지략가로서 육국이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여야 한다고 각국을 설복하여 육국의 정승을 겸했으며 10 여 년간이나 진나라가 감히 함곡관 동쪽으로 병력이동을 못하게 하였고, 동생 소대는 제나라와 연나라에서 활동하였고 동생 소역도 종횡술을 익혔다. 마왕퇴에서 출토한 백서 ‘전국종횡가서󰡑에는 소진의 서신과 여행기 16 건이 보존되어 있다. 한나라 때 소무(蘇武)는 무릉 소씨로 기원전 100년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19년간이나 구류를 당했다. 많은 위협을 당하고 바이칼 호에 끌려가서 양을 키워 살았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후한 때 부풍 평릉 소씨 소장(蘇章)은 무원령 관직 때 흉년을 만나도 기름진 땅을 찾아 일궈 백성의 기아를 구했다. 기주자사로 있을 때는 법을 잘 준수하고 사리사욕이 없었으며 의지가 강인했었다. 진(晉)나라 때 정현 사람 소준(蘇埈)은 수천 명의 유랑민을 규합하여 자위 조직을 만들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동진 초기 관군장군이 되었으며 군대를 이끌고 건강(강소성 남경)을 공격하여 딘독으로 정부를 세웠다. 16세기 전진(前奏)의 여류시인 소혜(蘇蕙)는 무공 소씨로 비단에 ‘회문선도시’를 수놓아 남편에게 보내 그리움의 감정을 잘 표현해 유명하고, 서위(西魏) 무공사람 소작(蘇綽)은 상서 겸 사농경(司農卿)으로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 아들 소위(蘇威)는 수나라 대신으로 임금에게 건의하여 백성들의 부역을 감해주고 울령격식을 제정하였다. 당나라 때는 소씨가 5명의 재상을 배출했으니 소양(蘇良), 소환(蘇環). 소미도(蘇味道), 소정(蘇廷), 소검(蘇檢)이다. 그 중 소미도, 소정은 모두 유명한 문학가였다. 또한 대장군 소정방, 시인 소원명도 있었다.

  북송 때 사천 소씨는 문단에서 혁혁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미산(사천성) 사람 소식(소동파)은 저명한 문학가, 서화가였으며 시의 품격이 독특하고 청신, 건강하였으며 단어가 호방하여 후대에 매우 영향이 컸었다. 그중 서법은 낭만적이었고 일취월장하여 문장의 기세가 웅장하고 성대하였다.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과 동생 소철(蘇轍)도 산문학의 대가로 이들을 합하여 삼소라 하고 당송(唐宋) 시대 8대가 중 3명이 모두 포함되었다. 소동파의 아들 소과역(蘇過亦)도 문학가였다.

  삼소와 동시대 시인 소순흠(蘇舜欽)은 재주동산(梓州銅山) 사람으로 천문학자이며, 의학자 소송(蘇頌)은 천주(泉州) 사람으로 한공렴 등과 ‘수운의상대’를 만들고 저서로 ‘신의상요법’, ‘도경본초’가 있는데 약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원나라 때 소천작(蘇天爵)은 강남행대에서 감찰어사로 활동할 때 백성들의 억울한 죄를 재심리하어 진실을 밝혔고 숙정방렴사 때는 개혁정치를 하였다. 청나라 말기에는 고급 장령으로 소천복과 소원훈이 있었고, 중국 무산계급 혁명가이며 중국 공산당 초기 저명한 노동운동 지도자인 소조정(蘇兆征)이 있다.

  대개 이상과 같이 요약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곤오공의 실체에 대해서는 한중(韓中) 모두 일치하나 중국에서는 곤오공이 동숙신(환국)에 망명하였고 한국에서 소성의 하백이 되어 기씨 성을 소씨로 바꾸어 소씨의 조조(肇祖)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고, 곤오공의 셋째 아들 소흘(蘇訖)이 중국에 들어가서 중국 소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이 사실도 모르는 채 곤오공에게 아들이 있었다고 막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곤오공의 이름이 번(樊)이라는 사실과 중국 역사상 많은 소씨들의 활약상과 출신지를 소상히 밝혔다는 점이다. 우리 족보와 함께 서로 보완하면 소씨의 내력이 보다 자명해질 것으로 믿고 여러 종친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끝으로 이 글을 씀에 있어서 상원공파 회장이신 도일(道一) 회장님의 도움이 컸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2005년 12월

                                                            경공 46세손 소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