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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씨의 유래
작 성 자 운영자 작 성 일 2010-11-16 17:45:30

이글은 진주소씨 회지 44호에 게재된 것으로 저자의 승인을 받아 옮긴 것입니다.

한국 소씨(蘇氏)의 유래

                                                                        글쓴이 : 대종회 부회장 소병석

1. 서론

  지금부터 30년 전만 해도 우리 소씨는 고려 말기 소희철 장군을 시조로 월주공이 만든 경술보 이전을 알 수가 없었다. 기껏 소씨의 자랑이란 양곡 소세양 할아버지께서 홍문관과 예문관, 즉 양관 대제학을 지낸 것을 내세웠을 뿐이다. 종인의 수도 매우 적어 가축인 소에 빗대 온갖 별명이 따라 다녔고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1975년 현파가승(玄坡家乘)이 발견됨으로써 진주 소씨의 시조는 신라 진덕여왕 때의 상대등 알천장군임이 밝혀졌고 신라 창업 공신 소벌공의 25세손임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1979년에는 동근보, 서풍보, 부소보, 소씨 상상계보 등이 잇따라 발견됨으로써 우리 소씨는 고려 때 생긴 별 볼일 없는 희성이 아니라 한 민족의 뿌리 종족이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영광스러운 씨족임이 밝혀져 소씨로 태어난 설움을 말끔히 씻게 되었다.

  그러나 소씨의 역사는 단군왕검 이전 2000년까지 올라가는 장구한 것이었고 그 내용도 엄청난 것이어서 그대로 후손에게 전하기엔 자칫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다각적인 연구와 사실규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행이 우리 상상계보는 흔히 옛날 문건이 그러하듯이 신비스럽고 황당무계한 설화, 전설이 아니라 국내외의 권위 있는 사서(史書)와 고고학, 언어학, 지리학 등 연구에 따라서는 실증이 가능하므로 우리 후손들은 끊임없이 연구하여 사실을 전하여야겠다. 이 연구 결과는 한민족 뿌리를 규명하는 일과도 일치한다.

2. 소씨(蘇氏)의 발상(發祥)

  진주 소씨 동근보(東權諸) 서문과 부소보(扶蘇譜)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가. 동근보 : 소씨는 적제의 후손이다. 기묘년(6223년 전) 여름에 갈천씨를 대신하여 제(帝)가 되었다. 환국의 영토에 소(蘇)를 심었다. 소의 기강과 덕의 교화로 백성들에게 풍도를 숭상케 한 것이 소를 성씨로 삼게 된 것이다.

  희경공(僖景公)은 부소(扶蘇)는 무궁화요 화랑의 큰 근본이며 국가의 기초라 했다. 여기서 희경공은 진주 소씨 시조 알천장군(휘는 경(慶))이 진주로 이사한 후 9대 9장군이 태어났는데 이 중 6대 장군 목(穆)이 청주도독을 역임하고 서기 870년 별세하자 국가에서 내린 시호이다.

  소씨가 생기고 5000여년 후에 신라의 소목장군이 무궁화라 해석하고 매우 추상적인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부소는 무궁화가 아니다. 무궁화는 시리아 원산지로 세계에 퍼졌는데 북위 38도 부근 이남 낮은 지역에 피는 꽃이다. 그러면 무궁화는 언제 신라지역에 왔는가. 중동지역에서 산출되는 유리제품이 4세기 조성된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빨라야 4세기쯤이고 728년 혜초가 인도와 중동을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지었는데 이때 혜초가 가져왔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 희경공은 혜초보다 약 100년 후에 활동한 사람이니 이때쯤 신라에는 무궁화 꽃이 널리 퍼졌을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가 1만 2천 년 전인데 지구는 꾸준히 온난화했다. 그래도 21세기인 지금도 무궁화는 황해도 이남에만 피고 있으니 희경공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궁화 꽃을 소씨의 상징 꽃으로 정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나. 부소보 : 우리 소씨는 구두씨(九頭氏) 후손인 적제에서 나왔다.

  상대등공이 말하길 옛날 적제가 있었으니 휘는 복해요 호는 축융(祝融)이다. 환국의 제가 되어 기묘년에 개국하니 풍주의 배곡에 도읍을 정했다. 조이(鳥夷)의 딸 항영(姮英)과 결혼하고 그를 황후로 삼았으며 9명의 아들을 낳아 9주에 봉한 뒤로 그 후손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여기서 축융이 최초의 지도자, 통치자임을 알 수 있다. 때는 신석기 시대 말엽으로 과연 성씨나 호 같은 것이 있을까? 문자가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구전으로 전했을 텐데 같은 내용이 우리 족보뿐 아니라 동국역대사에도 적제 축융이 새소리를 듣고 음악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중국의 역사학자 서량지(徐亮之)도 중국 역사가 시작하기 전 동이족의 음악은 이름이 높다. 축융의 후손 전욱 고양 제는 비룡씨에게 명하여 음악을 지었다고 했고 동국벌열보(東國閥閱譜)에도 소씨는 축융과 전욱의 후손이다. 육종은 곤오를 낳고 소나라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소씨는 축융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고 보다 치밀한 연구와 사료발굴이 필요하다. 또 하나 소씨의 발상지는 배곡이라 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로 민족의 뿌리를 밝힌 것이다. 배곡은 바이곡이고 바로 바이칼 호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은 바이칼 호 근처에서 발생한 것이다.

  우선 고고학적으로 바이칼 호 동쪽 브리야트 지역에는 신석기 시대 유물이 많이 나오고 특히 우리 민족의 특징인 빗살무늬 토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다음 언어학적으로 브리야트 언어는 우리 한국어와 그 문법과 단어가 유사한 것이 많다. 핀란드의 언어학자 람스테트가 젊은 시절 아시아어를 연구코자 일본에 왔는데 한국 유학생을 만나 몇 가지 한국어의 특정을 파악하고 한국어는 우랄 얄타이어 계통이라 했다. 이것이 이후 통설이 되었는데 계속 연구한 람스테트가 말년에 크게 후회하고 한국어는 우랄 알타이어의 할아버지어에 해당한다고 수정하였다. 따라서 몽골, 만주, 터키, 글안, 일본 등 아시아언어는 한국어에서 갈려나간 것이다.

  중국 임혜상 교수는 그의 저서 중국민족사에서 바이칼 호 동쪽에 문화민족이 있었으니 바로 신농씨의 원부족이라고 했다. 문화민족이 무엇인가? 원시부족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농씨는 삼황오제의 한분으로 우리 동이문화의 위인 중 하나이고 축융의 후손임을 많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결국 우리 소씨는 다시 말하면 한국인은 6000여 년 전 바이칼 호 근처에서 순록을 사냥하고 바이칼 호에서 어렵을 하며 일부 농사도 짓다가 남하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3. 소(蘇)는 무엇인가?

  소는 쇠요, 알이다. 쇠의 고대한자는 銕(철)이다. 즉 동이족이 쇠를 만들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쇠는 무쇠뿐 아니라 금, 은, 동, 아연 등 모든 금속을 말한다. 고대에는 쇠의 원료를 모래에서 채취했다. 그래서 모래알이란 말이 지금도 있다. 다시 말하면 모래의 알맹이 그것이 쇠의 원료다. 그 알을 채취하는 하천을 ‘알수’ 또는 ‘아리수’라 했다. 그 알을 채취하는 부족이 모여 사는 도시 또는 나라가 ‘아리성’이요 그 알로 쇠를 만드는 곳을 ‘소성’이라 했다. 그래서 아리성 또는 소성은 여러 곳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채취하는 강도 여러 곳에 있으니 흑룡강, 심양의 소자하, 압록강, 대동강, 한강, 경주 알천의 옛 이름이 모두 아리수다.

  그런데 쇠를 만드는 데는 엄청난 고열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철기술자는 불을 관리하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화정관은 그 부족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축융이란 바로 화정관이요 제철기술자다. 우리 소씨가 북소, 남소, 서소, 후소 등 여러 곳의 쇠나라 왕으로 봉했던 전통은 적제 축융이 후손들에게 그 제철기술을 물려줬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이야기는 우리나라는 삼국의 시조가 모두 알에서 나왔다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한다. 사람이 날짐승이나 파충류가 아닌데 어떻게 알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모두 제철집단의 대표자 또는 그 출신이라는 사실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새알로 변형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쇠가 많이 나는 지역은 가야지방이다. 고고학적 유물로 보나 삼국지 동이전 기록으로 보나 쇠를 많이 생산했고 많이 수출한 기록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가야에는 쇠를 만들 수 있는 부족이 많았다. 7개 부족이 있었는데 모두 왕이 되었다. 6가야가 그것이다. 그런데 금관가야에는 2개 부족이 있어 수로와 탈해 부족이다. 결국 치열한 경합 끝에 수로가 왕이 되고 석탈해는 신라로 망명해서 신라의 왕이 된다. 고구려의 주몽은 하백의 외손자라고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되었는데 학자들 해석에는 하백은 물귀신이라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물귀신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은 우리 소씨 시조 곤오공께서 최초의 하백으로 취임해서 하천을 관리하고 쇳가루를 채취하여 쇠를 만들던 직책이며 아리성(쇠성) 성주로써 수천 년 세습되어 오다가 고조선 말기에 성주 딸 아리낭자(아리랑) 유화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외가의 제철기술을 습득하였기에 소수 인원으로도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한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김씨는 소씨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축융 소복해의 자손에서 삼황오제가 나왔는데 그 중의 한분이 소호금천씨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가야왕족 김씨는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했고 신라 문무왕비에도 소호금천씨의 자손이라고 했으니 소씨에서 나온 것은 맞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 땅은 산동반도인데 소호금천씨의 나라가 바로 산동반도에 있었고 그의 묘가 지금도 산동성 곡부에 있으니 그 자손이 한반도에 건너올 가능성은 아주 높다.

  우리 성씨 소를 부소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불쇠 즉 부시를 말한다. 8.15 광복 전까지 각 가정과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부시를 가지고 다녔다. 쑥을 말려 부시깃을 만들고 차돌을 쇳조각(부시)으로 쳐서 불씨를 만들었다.

4. 곤오공(昆吾公)과 소성(蘇城)

  축융이 소씨인가? 이에 대하여는 우리 족보 동근보와 부소보에 기록되었을 뿐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우리 소씨는 직계자손이니 구전으로 대대로 이어져 족보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선사시대 인물이므로 실존조차 알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권위 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차도 축융씨가 간흑 언급되고 있으나 성씨에 관하여는 風, 姜, 姬, 己 등으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축융으로부터 그 자손 중 12대에 관하여는 그 족적과 성씨 등을 문자상으로 규명할 수 있어서 이를 정리하여 우리 진주 소씨 회지 제42호 26페이지에 필자가 발표한 바 있다. 소씨가 문자상으로 정착되고 수천 년간 세습 성씨가 된 것은 곤오공부터이다. 곤오공은 축융의 61세손이고 한, 중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우리의 득성시조라 할 수 있다. 곤오공의 행적에 관하여는 역시 회지 42호에 필자가 연구 발표하였다.

  요약하면 3황5제 중 한분인 고신씨(高辛民) 시대에 곤오공은 지금의 하남성 낙양 근처 허창 지역에 있던 곤오국의 제후로 봉해져 있었고 종조부 중여(重黎)는 국정을 총괄하는 대신으로 정치를 잘하여 백성들이 옛날 축융 같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공공씨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의 명을 받았으나 실패하자 무참히 처형당했다. 이때 진압군에 가담했던 곤오공은 자신도 처형당할까 염려되어 가족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고신씨는 군대를 보내 추격하였고 동숙신 홍제는 상장군 역통(力通)을 보내어 응전하고 곤오공은 의병을 모아 수등벌에서 격전 끝에 승리하였다.

  이 공로로 홍제는 곤오공을 소성의 하백(河伯)으로 봉하였다. 아마도 곤오공은 곤오나라가 원래 철, 금, 구리가 풍부한 지역으로 제철기술자를 다수 대동하고 망명했음으로 쇠성(소성)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 같다. 그래서 본래는 기(己)씨였으나 소(蘇)씨로 성을 바꾸고 오늘날까지 이어온 것이다.

  곤오공 슬하에는 소갑(蘇岬), 소환(蘇桓), 소흘(蘇紇) 삼형제를 두었으니 큰아들 소갑은 오늘날 한국 소씨의 큰 맥을 이은 종가가 되었고, 셋째아들 소홀은 서숙신으로 귀환하여 중국 소씨의 시조가 되었다. 필자가 중국에서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곤오공의 동숙신 망명 사실도 모르고 있고 소씨 시조는 곤오공의 아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셋째아들 소흘이라는 사실조차 명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 소풍(蘇豊) 곤오공이 봉해진 소성은 어디인가? 부소보는 부소갑(扶蘇岬)이라 했다. 부소갑은 또 어디인가? 혹자는 만주 하얼빈이라고 추정하였다. 생각건대 하얼빈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얼빈은 고조선이 있던 요동반도와 너무 떨어져 있어 영토도 아닌 미개지이며 단군조선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나, 비파형동검, 고인돌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송화강이 직강(直江)으로 쇳가루를 채취할만한 모래톱이나 굴곡진 곳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얼빈이 대도시화된 것은 불과 100년 전 러시아가 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개발하여 도시가 된 것이고 러시아가 개발하기 전에는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하얼빈 명칭 자체가 만주어로 그물을 말리는 곳이다.

  그렇다면 부소갑은 어디일까? 필자는 심양 남쪽 소가둔(蘇家屯)이라고 추정한다. 소자하(蘇子河) 변에 있어서 철 생산에 적합하고 위치적으로 고조선 심장부에 가깝고 청동유물이 다량 발굴되기 때문이다. 또한 명칭 자체가 우리 소씨 발생지와 연관성이 많기 때문이다.

5. 소백손(蘇伯孫)과 소벌공(蘇伐公)

  곤오공의 70세손 소백손은 고조선 수상 소대알(蘇大閼)의 장남이다. 기원전 3세기말 진한 (秦漢) 교체기에 대륙에 살던 교민과 중국인이 다수 피난하여 몰려들고 위만이 이들을 규합하여 반란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백손공은 조선유민과 제철기술자 신유(申有), 진기 (陳岐), 신천(神川), 발산(發山) 등을 인솔하여 경주시 형산 남쪽 국당리 지역에 도착하고 BC 209년 임진년에 나라를 세웠다. 고조선 직할영토가 진한임을 감안하여 후진한이라 국호를 정하고 계속 모여드는 조선유민을 다스리게 되었다.

군주명은 도리(都利)인데 5대를 계속하여 벌공에 이르렀다. 삼국유사에 소벌공은 하늘에서 형산에 내려왔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조선민족 자신이 하늘나라 백성임을 자처했음으로 조선 본국에서 왔다는 말이고 벌공의 고조부 소백손의 이동 사실이 시간이 많이 흘러 변형된 것이다. 소벌공은 협소한 형산 지역에서 넓고 사철(沙鐵) 채취에 유리한 형산강 상류지역인 오늘날 경주 남산으로 이동하여 고허촌을 건설했던 것이다. 백손공과 같은 이유로 경주지역에는 6개의 집단이 있었으니 이를 통합할 필요가 있어 소벌도리공은 알천(북천) 백사장에 촌장회의를 소집하여 통합국가 건설을 논의하였다.

  소벌도리공은 가장 규모가 큰 부족집단의 지도자로서 고허촌에서 왕을 추대하기로 합의하고(나정, 알령정 모두 고허촌 지역에 었다.)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여 서라벌을 건국하였다. 박혁거세에 관하여 윤치도(尹致道)씨는 고허촌장에게 영특한 아들이 있어 숙성하고 영위 (英偉)함이 가히 군왕의 기상인지라 육촌장이 합의하여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하여 아예 소벌공의 아들로 간주하였으나 그 때 소별공은 72세요 장남 해리(解利)공은 45세이니 손자라고 하여야 이치에 맞다. 그렇지 않다면 집안에서 가장 유망한 인재였을 것이다. 이때가 BC 57년인데 AD 32년 유리왕 9년에는 각 촌의 이름을 고치고 6성을 하사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소벌공을 최씨의 조상이라 하고 삼국유사는 정씨의 조상이라고 한다. 우리 상상계보를 보면 모두 맞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소벌공의 증손자 이정(利貞)공이 최씨를 하사받았으며 역시 증손자 소빈(蘇彬)이 정(鄭)씨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혈통상으로는 모두 소벌공 자손이다. 중요한 것은 유리왕이 당시의 유력자에게 성씨를 하사한 것이지 그 증조할아버지에게 소급해서 성씨를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소씨, 박씨, 최씨, 정씨는 다투지 말고 동조동근(同祖同根)임을 서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안동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경주 김씨 김행(金幸)에게 권(權)씨를 하사했으나 혈통상으로는 역시 김알지의 후손인 것과 같다.

6. 진주 소씨와 시조 소경공(蘇慶公)

  진주 소씨의 조상은 소벌공의 25세손이며 진덕여왕 때의 상대등인 소경공이다. 소경공은 진골귀족의 수장으로서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진주로 낙향하여 우리의 직계조상이 되었다. 신라는 엄격한 신분사회로써 각각 신분에 따라 옷 색이 다르고 집 크기가 다르며 관직을 맡을 한계가 있었다. 왕은 부계 모계 모두 왕족인 성골이어야 하고 최고 관직인 상대등, 각간은 한쪽만 왕족인 진골이 아니면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26대 진평왕에 이르러 성골 남자는 아무도 없어 할 수 없이 성골 여자 선덕여왕이 생겼으며 또 그 뒤를 사촌동생 진덕여왕이 계승하게 되었다. 진덕여왕은 진골귀족 중 최고 서열과 전공(戰功)이 뛰어난 소경공을 상대등(영의정)으로 삼고 국정을 주도케 하였다.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이제는 진골 중에서 왕을 추대할 수밖에 없는데 77세의 소경공은 이때 신노(身老)하다 하여 젊은 진골 중 국제적 명성이 있는 김춘추를 대신 추천함으로써 태종무열왕이 되게 하였다. 태종무열왕은 소경공의 덕행에 보답하는 뜻으로 공의 24대조인 소벌공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 공의 15세손 소계령은 고려 헌종 때 이부상서가 되었으며 따님이 회순왕후(懷純王后)로 봉해져 진산부원군이 되었고 그 후 원종2년에 무숭공(戊崇公)께서 진주로 관향을 공인받게 되었다.

                                                    2006년 1월 15일

                        신라 상대등(上大等) 알천공(閼川公) 46세손 소병석(蘇秉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