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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소씨(晉州蘇氏) 내력과 시조(始祖)와 선조(先祖)
작 성 자 운영자 작 성 일 2009-02-15 17:52:59

 

진주소씨(晉州蘇氏) 내력과 시조(始祖)와 선조(先祖)

 

소씨(蘇氏)는 진주(晉州)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단일본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진주를 비롯하여 진강, 충주, 능주, 익산, 조양등 12개의 본관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모두 진주소씨의 분파세거지(分派世居地)를 이르는 것으로 본다.

소씨의 원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비등한 수천 년의 세월을 만날 수 있으니, 이 땅에서 가장 뿌리가 깊은 유구(悠久)한 씨족사를 지닌 성씨라 일컬을 만하다.

소씨(蘇氏)의 연원(淵源)은 동구이(東九夷:배달겨레의 옛 이름)중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赤帝祝融:왕의 칭호)이 기원전 4241년 풍주배곡(風州倍谷)에 도읍을 정하고 전국토(全國土)에 무궁화(蘇)를 심어 성(姓)을 소(蘇),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는 말과 함께 그의 61세손(世孫)인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비서압, 부소압으로 현재의 길림성)의 하백(河伯)에 봉해졌고, 소풍(蘇豊)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기원전 209년에 진한(辰韓)을 건국하였다.

진주소씨세보(晉州蘇氏世譜)에 의하면 오방신장(五方申將)의 하나인 적제(赤帝)의 61세손 태하공(太夏公) 풍이(風夷)가 기성(己姓)을 소성(蘇姓)으로 바꾸어 소씨가 되었는데, 태하공이 적제의 배곡(倍谷)에서 처음엔 난하(灤河)로 옮겼다가 숙신(肅愼)의 홍제(洪帝)때에 불함산으로 들어가 그곳에 봉해졌으며, 나라 이름을 유소국(有蘇國)이라 하였다. 그 뒤에 공의 후손들 중 일부는 중국대륙으로 가고 일부는 한반도로 이동하였는데, 태하공의 69세손인 진공(辰公) 백손(伯孫)이 경주로 옮겨 후진한 군주(後辰翰 君主)가 되고 그 뒤 27대(代) 동안 살았다. 신라 6촌의 하나인 고허촌(高墟村)의 촌장 소벌(蘇伐 = 蘇伐都利公)이 바로 진공(辰公)의 5세손(世孫)이다.

기원전 57년에 와서 소백손(蘇伯孫)의 5세손 소벌(蘇伐)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세워 신라(新羅)를 건국했고 벌(伐 = 蘇伐都利)의 25세손 알천(閼川 = 改諱 慶)은 서기 638년 선덕여왕(善德女王) 7년 이찬(伊湌)이 되면서 각간(角干)에 올랐고, 서기647년 진덕여왕(眞德女王) 1년 2월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고 각종 문헌에 기록되었다.

시조(始祖) 소경(蘇慶)은 진공(辰公:휘 백손)의 29세손으로 상대등(上大等)을 역임한 후, 서기 660년(태종무열왕 7년) 봄 3월 3일에 진주의 도사곡(塗斯谷)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공의 15세손인 계령(繼笭)공이 고려조(高麗朝)에서 크게 현달하여 신호위 상장군(神虎衛 上將軍),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고, 그 따님이 헌종(獻宗)의 왕비(王妃)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에 책봉됨으로써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소씨(蘇氏)가 진주(晉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진주소씨는 시조를 경자보(庚子譜) 족보 수간(편찬)할 때까지는 문공공(文恭公) 희철(希哲)공으로 삼아왔으며, 1951년 발견된 양곡공(陽谷公) 후손 소창엽(蘇昌燁)이 소장하고 있는 세계보(世系譜)인 부소보(扶蘇譜)와 1975년 발견된 소종만(蘇鐘萬) 소장(所藏)인 소치선가승(蘇致善家乘)에 의하여 비로소 문헌사적(文獻事蹟)과 분묘소재(墳墓所在) 등의 고증이 이루어져서 오늘날과 같이 상대등 경(慶)공을 시조로 바로잡게 되었음이 신유보(辛酉譜)에 나타나 있다.

상대등공의 묘역은 오래도록 실전되었던 것을 1975년 봄에 찾아 봉심(奉審)하게 되었다.

소경(蘇慶)은 577년(진지왕 2년)에 태어나 신라 최고관직인 상대등(上大等:17관등을 초월하여 임명하던 최고 관직으로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여 다스리는 한편, 화백과 같은 신라6대 귀족회의의장)에 올랐다. 진덕여왕이 서거하자 여러 군신들이 공에게 섭정을 청하였는데, 이를 사양하며 "신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춘추(春秋)는 덕망이 숭중(崇重)하고 실로 제세의 영걸이라 아니할 수 없다"하고 김춘추(金春秋)를 추대하였다. 태종무열왕이 경공(慶公)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공의 조상이신 소벌(蘇伐 = 蘇伐都利公)공을 문열왕(文烈王)에 봉하였다.

신유보에 보면 공은 소백손의 29세손이요, 또한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25세손으로 초명(初名:본명)은 소알천(蘇閼川)이다. 나이가 팔순이 넘도록 손(孫)이 없었는데, 어느날 꿈에 선조인 백공(白公 = 蘇伐公)이 나타나 “그대가 도사곡으로 옮겨 살면 반드시 구치자(9장군)를 얻으리라”고 하였다. 이 꿈을 꾼 후 경공께서 660년(태종무열왕 7년) 3월 3일 그곳 도사곡(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으로 이사하였으며, 결국 661년 1월 10일 며느리 석씨(昔氏)가 손자 복서(福瑞)를 낳았다. 이에 그 기쁨으로 경공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경사로울 경자(慶字)를 써서 '경(慶)'이라 개명(改名)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공의 3세 복서(福瑞), 4세 억자(億滋), 5세 후준(後俊), 6세 검백(劍白), 7세 상영(尙榮), 8세 목(穆), 9세 은(恩), 10세 송(淞), 11세 격달(格達)까지 9세 9장군(9世 9將軍)이 이어져 현몽의 내용과 일치하는 구치자(九豸者 : 장군)를 얻었다.

신라 말기에 왕봉규(王逢規)의 난(亂)으로 인해 멸문지경에 이르렀으나 장군(將軍) 격달(格達)이 왕건(王建) 휘하에서 공(功)을 세워 대장군(大將軍:무관의 으뜸 벼슬)에 올라 고려(高麗)때까지 관직을 지냈으며,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진 계령(繼苓)공을 비롯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광보(光輔) 등 7명의 정승(政丞)이 배출되었다.

고려조(高麗朝)에서 15만을 헤아리던 소씨(蘇氏)는 몽고의 침입으로 두 번째 멸문지경이 되었다가 희철공(希哲公)이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가운(家運)을 다시 일으키기 시작하여 1261년(고려 원종 2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무숭(茂崇)이 진주를 사관(賜貫) 받았다.

한편 도사(都事)를 거쳐 구례 현감(求禮 縣監)을 지낸 자파(自坡)공의 아들 7형제가 크게 현달(顯達)하여 명성을 날렸는데, 그중 둘째 아들인 세량(世良)공이 대사간에 오르고, 다섯째 아들인 세양(世讓)공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동명(東鳴)공의 아들 두산(斗山)공이 숙종(潚宗)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랐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배척 당할 때 개탄(慨嘆)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후로는 소씨(蘇氏)의 관계(官界) 진출(進出)이 크게 둔화(鈍化)되었다.

이상과 같이 뚜렷한 고증(考證)과 설화(說話)를 바탕으로 한 씨족의 기원(紀元)과 흥기(興起)를 밝혀주고 있는 성씨는 흔치 않으니, 이는 우리 민족 역사와 함께 매우 귀중하고 소중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소씨는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서 전통(傳統)과 가풍(家風)을 이은 명문가(名門家)로써 긍지(矜持)와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집(文集), 유물(遺物), 유적(遺蹟) 등 관리와 전국 종친들의 결속(結束)을 다지는데 자발적인 참여와 협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