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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소씨 시조 알천공 유사
작 성 자 운영자 작 성 일 2008-12-24 14:40:01

 

진주소씨 시조 소알천(개휘:경) 상대등공 유사

(晉州蘇氏 始祖 蘇閼川(改諱:) 上大等公 遺事)

 

  공(公)의 휘(諱)는 경(慶)이요 초휘(初諱)는 알천(閼川)이시고 진주소씨 시조(晉州蘇氏 始祖) 이시다. 공(公)은 단기 2910년(서기 577년) 정유(丁酉) 5월 6일 신라국 제25대 진지왕(眞智王) 2년에 아찬(阿?) 휘 휴곤(休昆: 初諱는 武殷)의 다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차남은 조부령(調部令)이신 휘 태호(太乎)이시고 삼남은 신라 고승 원광법사(圓光法師)로부터 화랑도와 신라인의 중심사상이 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으시고 부친을 따라 백제 침공을 막다가 아막성(阿莫城)에서 친구 추항(?項)과 같이 전사하신 내마(奈麻) 휘 귀산(貴山)이시고, 사남은 창부령(倉部令)이신 휘 외사부(外斯夫)이시며, 오남은 휘 문우(文于)이시다. 공(公)은 태어나시면서 부터 풍체가 당당하고 영특하시어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고 국선(國仙)이 되신 후에 더욱 낭도(郎徒)들을 잘 인솔하고 성원을 받았으며 무예와 지식을 닦으면서 성장 후 군사에 편입되어 전장에 나아가 싸우면서 승진하였다.

  휘 알천(閼川)의 청장년 시기는 실로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이 영토 확장을 꾀하여 변방은 항시 전쟁이 연속되었고, 특히 백제 무왕(武王) 재위 41년과 의자왕(義慈王) 재위 20년간은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혔고 고구려 또한 변방 침공이 잦았다.

  신라에서는 알천(閼川)장군, 용춘(龍春)장군, 필탄(弼呑)장군 등 많은 장군들에게 외침(外侵)이 있을 때 마다 군사를 주어 해당 성주(城主)와 더불어 싸우게 하였다. 2969년(서기 636년) 5월 선덕여왕(善德女王) 5년에 백제대군이 독산성(獨山城)을 침공할 때 알천(閼川)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군을 맞아 크게 승리하였고, 백제군은 우소(于召)장군이 포로가 되는 등 많은 손실을 입고 패퇴하였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이같이 충성스럽고 치밀하며 합리적이고 과감한 공(公)을 대장군(大將軍)으로 보(補)하고 각 전장을 통솔토록 하였으며, 한편 2971년(서기 638년) 고구려병이 칠중성(七重城 : 積城)을 침공할 때는 공(公)이 친히 장병을 이끌고 나아가 고구려병을 물리쳤다.

  같은 시기에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자 이를 듣고 백제군이 침공하기 위하여 매복하고 있음을 판단하고 알천(閼川)장군으로 하여금 여근곡(女根谷 : 五峰山 富山下 溪谷)에 가서 숨어 있는 백제군을 토벌하라고 명하여 공(公)은 이를 섬멸한 후 후속부대까지 패퇴시키고 돌아와 알천장군은 선덕여왕에게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알고 계셨는가? 고 물으니 왕은 여근곡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니 이 대담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후 공(公)은 각간(角干)직과 이찬(伊?) 벼슬에 올라 내정에 적극 참여 하였으며 2980년(서기 647년) 정미(丁未) 2월에는 신라 최고관직(新羅 最高官職)인 상대등(上大等)에 오르시고 귀족회의(貴族會議 : 和白) 의장이 되시니 당시 회백회의 임원은 임종공(林宗公), 술천공(述川公), 호림공(虎林公),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었다.

  2987년(서기 654년)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L 재위 8년)이 승하(昇遐)하시자 조정 군신들은 모두 공(公)에게 왕위(王位)에 올라 섭정(攝政)하여 주실 것을 간청(懇請)하였으나 공(公)은 이를 완곡(婉曲)히 물리치고 “신(臣)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춘추(春秋)공은 국세(國勢)의 덕망(德望)이 숭중(崇重)하고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다”라고 춘추공을 추천하여 왕위를 권하였으나 사양하다가 알천공(閼川公)의 강력한 권유(勸誘)에 의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곧 후에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시다.

  그후 무열왕(武烈王)은 2989년(서기 656년)에 알천공(閼川公)의 국가에 대한 공로(功勞)를 가상(嘉賞)하고 자신(自身)을 왕위에 오르도록 한 감사의뜻을 모아 공(公)의 24대 조(祖)이신 소벌공(蘇伐公)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 이때 공(公)은 연로(年老)하여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더불어 여생을 보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공(公)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師今)의 14세손이고 상대등 총지국사장(上大等 摠知國事長) 선(宣)의 딸인 영아부인 박씨(玲阿夫人 朴氏)와 혼인하여 일자(一子)를 두었으니 이가 곧 휘 이벌(諱 利伐, 호는 山史, 改諱 : 老欣)이시고 이벌공은 예부령(禮部令) 경태(京太)의 딸인 이우부인 석씨(利雨夫人 昔氏)와 혼인하였으나 늙도록 후사가 없어 서로가 개탄(慨歎)하고 있을 때 하루는 공(公)의 꿈에 소벌공(蘇伐公)이 나타나 현몽(現夢)하시기를 “그대가 도사곡(塗斯谷)으로 이거 하면 가히 구치자(九將軍)을 얻으리라”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아부인 박씨와 자부 이우부인 석씨도 이상동몽(異床同夢)이었으니 이는 필시 조상(祖上)의 계시(啓示)라 생각하고 2991년(서기 658년) 무오(戊午)년 가을 청강(菁江:南江)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니 꿈의 계시대로 감나무 가지가 아홉 개이고 그 감나무(九?木) 밑 그릇에 새겨진 글자가 “이곳은 구치자가 날곳이요 후세에 반드시 20여명의 장수와 재상이 나올 땅이다”라는 내용을 보고 공(公)은 그곳에 집을 지어 2993년(서기660년) 3월 3일에 이사하고 이곳을 도사곡(塗斯谷)이라 이름하였고, 이사 후 손자 휘 복서(福瑞)을 얻으시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집안의 경사를 맞게 되어 공(公)은 존함(尊啣)을 경사경(慶)자로 개휘하였고 공(公)의 독자 이벌(利伐)은 노년에 얻은 기쁨으로 역시 존함을 노흔(老欣)으로 개휘하였다.

  그후 노흔공은 이남 복상(福祥)과 삼남 복정(福廷)등 삼형제를 두시었고 후일 이곳을 도사곡에서 소경의 존함을 따서 소경동(蘇慶洞)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벼슬 이름을 따서 상대동(上大洞)으로 바꾸었으니 현재도 이곳이 진주시 상대동이다.

  그후 손자인 3세 휘 복서(福瑞)는 국선(國仙)을 거쳐 청주총관(菁州摠管)이 되시고, 4세 휘 억자(億子)는 한주총관(漢州摠管), 5세 휘 후준(後俊)은 상주총관(尙州摠管), 6세 휘 검백(劍白)은 웅주도독(熊州都督)이 되셨고, 7세 휘 상영(尙榮)은 청주도독(菁州都督), 8세 휘 목(穆)도 청주도독(菁州都督), 9세 휘 은(恩)은 웅주도독(熊州都督), 10세 휘 송(淞)은 강주도독(康州都督), 11세 휘 격달(格達)은 하동태수(河東太守)을 거쳐 고려국(高麗國) 대장군(大將軍)이 되시었다.

  공(公)이 도사곡으로 이사하신 후 9대 9장군이 이어 나왔으니 이는 구시목(九?木)의 은덕으로 기리고 있다. 공(公)은 손자 삼형제(三兄弟)와 더불어 화락(和樂)한 노년을 보내시다가 3019년(서기 686년) 10월 12일 조용히 유명(幽明)을 달리 하시니 수(壽)는 백십세(百十歲)이시다.

  묘지(墓地)는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록(仙鶴山麓)에 있고 대각간(大角干) 김인문(金仁問)이 비문(碑文)을 썼으나 보존되지 못하고 유실(遺失)되어 4310년(서기 1977년) 전국 종친회에서 재건비(再建碑)하고 예장석(禮葬石)과 조경(造景)을 하였으며 4322년(서기 1989년) 월훈석(月暈石)등으로 묘소를 개수 조경하였다.

  진주소씨는 상계(上系)가 확실하여 시조(始祖) 휘 경(慶)으로부터 24대조가 신라국(新羅國) 창건(創建)시 초대왕인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양육한 소벌공(蘇伐公)이시고, 28대조가 후진한(後辰韓) 주이신 백손공(伯孫公 : 辰公)이시며, 그 이상 상상계(上上系)로 96대조가 태하공(太夏公 : 豊公)에 이르는 상상계원류계도(上上系源流圖)를 가진 오래된 토성(土姓)중의 하나이다.